죽은 가운데 살아나야
94. 죽은 가운데 살아나야
모든 물성은
변화성이며
시간성으로서
생로병사 합니다.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한번은 죽습니다.
물성의 운명이며
유한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유한을 벗어나
무한을 증득하려고
진리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무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내면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냥 죽기만 하면
살아서도 죽음을 모르고
죽어서도 죽음을 모릅니다.
남의 죽음을 보고
간접 체험을 하지만
자기의 죽음이 아니기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두렵기만 하고
막을 힘이 없습니다.
권력이 커도 피할 수 없고
돈이 많아도 피할 수 없고
지식이 많아도 피할 수 없습니다.
물성으로서는
시간성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태어난 자는
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유한 자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생전에
죽어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죽은 가운데
살아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차원에서는
죽음과 삶은
동시에 존재하지 못하는
양극이라서
만나지지 않습니다.
생각으로는 뚫어지지 않습니다.
물성을 관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질의 눈이 필요합니다.
살아생전에 죽어봄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살아생전에
무엇이
죽어봄일까요?
몸이 살아생전에
생각이 죽어 봄 입니다.
생사가 동시에 공존합니다.
몸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모든 생각이 사라져
무심이 드러나서
고요가 존재함이
생각의 죽음입니다.
생사일여입니다.
생각의 죽음은
고요의 복원입니다.
이것이
살아생전 죽어봄입니다.
그러면
죽은 가운데
다시 살아남은 무엇인가요?
한 생각이 사라진
한 생각이 죽은
내면의 고요 가운데
새로운
한 생각을 만들어 냄이
바른 생각의 탄생입니다.
무심 가운데 일심을 내는 것입니다.
무한 가운데 유한을 만드는 것입니다.
죽은 가운데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부활이 아니고
차원이 바뀐 것입니다.
물성이 죽어 영성이 복원된 것입니다.
영성이 주인이 되면
물성을
거느리고 다스리고 부리고 씁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죽어주고
얼마든지 살아나고
생사가 분명한 가운데
생사가 둘이 아니라서
아무렇지도 않고
자유자재입니다.
가짜가 사라지면
진짜가 살아집니다.
구름이 사라지면
하늘이 드러납니다.
유한 에고가 죽으면
무한 고요는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생사
진리
고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도착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면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임박해서야 직면합니다.
몰라서 묻기 어렵고
물어도
대답해줄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대신해줄 사람이 없고
안내자를 만났을 때 해결 보는 것이
복중의 큰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