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는 것이 먼저이다.
62. 눈을 뜨는 것이 먼저이다.
외면을 말하는가 내면을 말하는가?
현상을 말하는가 본질을 말하는가?
육안을 말하는가 영안을 말하는가?
외면, 현상, 육안은 가르치지 않아도
아무나 다 잘 사용하고 있다.
깨달음이라고 하면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한
내면, 본질, 영안에 대한 자각이다.
추구하는 방향이 밖이 아니라
자기 내면인 안쪽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에 팔려
자기의 안을 볼 여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것인가에 대하여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관심사라고 하여 묻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밖의 이야기이다.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도
본질, 내면, 영안을
뜨는 것에 대하여 안내하기 보다는
밖의 이야기에 대하여
영합하거나 편승하여
대화를 주고받는다.
피상적인 이야기이고
겉도는 이야기이다.
잠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 하지만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스승께 기대고 또 기댄다.
홀로 독립하는
인간이 되게 하지 못하고
무리를 짓는 중생으로 만들고 만다.
남을 도우라는 말은
물성인 생각모드에서 보면
그럴듯한 말로 보인다.
그러나 뜬눈으로 보면
본질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남을 돕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홀로 서는 것이 먼저이다.
남을 사랑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위성을 먹여 살리고자 한다면
먼저 태양이 되어야 한다.
남의 눈을 뜨게 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
착각이고 꿈을 꾸는 것이다.
우선 자기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장님인 상태에서는
단 한 사람도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남을 돕는다고 간섭할 일이 아니다.
진정 존재만으로도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자기 내공을 먼저 준비하여야 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무엇이 정법인지 사법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눈을 뜨는 것이 먼저이다.
자기 내면의 눈
자기 본질의 눈
자기 영안을 복원함이
먼저이고 중요한 것이다.
거름지고 달려가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돌아보아야 한다.
걷고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자기의 내면을 보기 시작해야 한다.
자기의 몸을 돌아봄 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을 돌아봄 해야 한다.
자기의 생각을 돌아봄 해야 한다.
그래서 내면의 고요가 복원되어야 한다.
물성인
생각이 모두 사라진
텅빈 무심 내면 고요
본질 심안 영안을
먼저 복원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싸움이 끝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욕이 끝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재색명리가 끝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밥 한술 먹으면
지금 여기가
천당 극락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미 그 사람이 홍익인간이다.
이미 그가 존재하는 곳이 이화세계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은
결심이나 다짐이나
구호나 선동이 아니다.
홍익인간이라는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자기 몸을 잘 돌보아 사랑하고
자기 마음을 잘 돌보아 사랑하고
자기 생각을 잘 돌보아 사랑하고
궁극에는
내면의 눈이 복원되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홍익인간이다.
내면의 눈이
복원된 사람의 눈에는
외면이 내면에 들어오게 된다.
내면의 거울
본질의 눈에는
나의 무심이나 너의 무심이
텅빔으로서 다르지 않다.
상대방을 아끼려고 해서
아끼는 것이 아니고
나의 고요한 내면과
너의 고요한 내면이 다르지 않아
둘이 아님을 보아
자연히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보게 된다.
내면
심안이 복원만 되면
모두
내가 아닌 것이 없다.
구호나 주장이나
선동이나 율법이 아니어도
자연 너와 내가 둘이 아니게 보여
내가 나를 대하듯 대하게 된다.
먼저
열매를 취하려 할 것이 아니고
씨앗을 심어야 한다.
달려가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고
내면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다.
장님이 장님들을 안내하는
반복을 벗어나려면
먼저 내가 내면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시작이다.
남 걱정할 여가가 없다.
모든 힘을 모아 나의 눈을 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