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봄(觀)
36. 생각과 봄(觀)
생각, 마음, 감정, 느낌은
모두 같은 물성이다.
모두 몸의 반영물로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모두 생로병사가 있는
시간성의 산물이다.
물질인 것이다.
여기서
더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마음은
있다 없다 한다는 측면에서
변화하는 것이며
물성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경전에서
마음(心)을 본심, 진심, 무심, 일심,
마음자리, 마음밭 이라는 말로서
사용해 왔기에 대단히 혼동이 심하다.
어느 때는
번뇌망상으로 사용하다가
어느 때는
본성으로 사용하다가 하여
명확하게 구분을 못하게 한다.
그래서
정신, 몸, 마음의
항렬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정신을 태양이라면
몸은 지구이고 마음은 달이다.
정신이
본질 영성 주시자라면
몸과 마음은
물성 행위자인 것이다.
몸과 마음은
변화하는 물성이며,
정신이
변화 없는 영성임을 확고히 해야
혼란이 없고 헤매지 않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과 봄의 관계가
명확하게 정립되어야 한다.
생각을 감각하지 못하는 단계에서는
생각도 보이지 않고
주시자도 감각되지 않기에
생각과 정신이 구별되지 않는다.
생각은
있다 없다하는 변화하는 것이다.
몸의 반영물로서
몸이 없으면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몸이 있기에
몸에서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생각의 속성은
생로병사가 있다는 것이고
있다 없다 하는
변화하는 물성이라는 것이고
시간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움직이는 것이고
행위자이다.
여기서 착안점은
생각을 내는 줄도 모르고 내던 차원에서
생각을 내는 것을
관찰하는 차원이 있음을 체험해야 한다.
생각이라는 행위자 차원에서
생각을 내는 행위를 주시하는
주시자 차원을 복원해야 한다.
행위자의 삶에서
행위와 주시가 공존하는 삶으로의 복원이다.
주시의 눈은 주시할 때 복원된다.
일고지는 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관찰할 때
관찰자의 눈은 복원된다.
주시자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에 항상 깨어 산다는 것이다.
한 생각에 대한 주도권이
정신한테 있음을 말한다.
한 생각에 끌려가는
생각의 노예가 아니고
한 생각을
내려면 내고
내지 않으려면 내지 않는 주권이
정신인 나한테 있는 것이다.
자동차로 치면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는 것이고
소로 치면
주인이 고삐를 잡은 것이다.
이래서
생각을 감각하지 못하다가
감각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기의 몸과
마음, 생각, 감정, 느낌을
무자각하여
깨어 살지 못하다가
하나하나 자상하게
돌보며 사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생각을 내는 차원에서
생각을 내는 것을 감각하는 차원으로.
물질에서 본질로
물성에서 영성으로
행위자에서 주시자의 삶으로
차원변경 차원상승하는 것이다.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의 주인으로의 복원이다.
무형한 봄(觀) 영성 정신이
유형한 생각(思) 물성 입자를
잘 보아주고
거느리고 다스리고 부리고 쓰는 삶이다.
주객이 바로 잡히게 되는 것이다.
생각을 항상
보고 관찰할 때만이
관찰자의 눈
주시자의 눈
한눈!
정신이 차려지고
정신이 들어
정신이 주인으로 사는 삶을 살 것이다.
생각과 봄(觀)이
구별이 간다면
매의 눈을 갖은 것이고
구별이 가지 않는 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보면 맞다.